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초판 인쇄 2010년 5월 10일
신경숙 지음
p.107
-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나는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 그러면 어떻게 될까?
- 지금의 우리 얼굴이 노인의 얼굴이겠지.
그의 늙은 얼굴도 나의 늙은 얼굴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
.
그렇지 않아?
그가 나에게 부질없는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 가장 젊은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고 가장 늙은 얼굴로 지금 이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그건 괜찮아?
.
.
- 그 생각은 못 해봤어.
나도 인생의 끝에 청춘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못 해봤다. 나는 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
p.108
-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작년의 오늘과 지금의 오늘을 구별하지 못했을 거야.
pp.110~112
- 새벽에 눈을 뜰 때마다 생각해. 학교에 갈까? 거리로 나갈까? 학교에 있어도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거리에 있어도 마찬가지야. 뭔가에 떠밀리듯 거리로 나오지만 어느덧 오늘처럼 나 홀로 떨어져 있곤 하지. 어느 때는 눈을 뜨면 코를 푼 휴지를 휴지통에 던지면서 제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면 학교에 가고, 안 들어가면 거리로 나가고 그랬어. 어느 때는 누가 찾아내주기를 기다리면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도 하고.
- ......
- 학교에 너가 있어서 가기도 했어.
나는 갑자기 윤미루에 대해 결렬하게 솟구치는 나의 궁금증이 두려워졌다. 그렇게 알게 되는 것들은 그와 나 사이를 가깝게 할까, 멀어지게 할까?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해준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비밀을 털어놓은 적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소중했던 비밀이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다른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p.327
어느 엽서에는 쥘 쉬페르비엘의 시[1]가 적혀 있었다. ‘세 개의 벽과 두 개의 문 뒤에서/당신은 내 생각을 조금도 않지만/하지만 돌도 더위도 추위도/또한 당신도 막을 수는 없지/내 맘대로 내 속에서/마치 계절이 오가며/땅 위에 숲을 만들듯/내가 당신을 부쉈다 다시 맞추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