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초판 1쇄 발행 2005년 11월 4일
안소영 지음, 강남미 그림

pp.121,122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우정은 가난할 때의 사귐이라 합니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벗이었습니까?’

pp.30~34

맹자에게 밥을 얻고 좌씨에게 술을 얻다.

제 속을 모두 열어 보이고 온몸을 다해 나의 어려움을 덜어 준 책이었지만, 나는 몹쓸 짓을 하기도 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거듭되는 흉년에 온 식구가 오래도록 굶주려 있을 때였다. 표정 없는 어른들의 얼굴도 그렇지만, 어린 동생과 아이들의 퀭한 눈망울은 더욱 애처로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의 주린 속에 곡기를 넣어 주어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방 안에 앉아서, 일곱 권이나 되는 《맹자(孟子)》 한 질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처음 얻었을 때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뿌듯하고 설레었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맹자》와 나의 인연은 그리 길 지 않은 것이던가, 아쉽기만 했다.
지금이야 서가라 해도 좋을 만큼 어느 정도 책들이 채워져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가진 책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생계조차 제대로 꾸려 가지 못하는 내 처지로 책을 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귀한 책을 보면 갖고 싶고, 좋은 책을 보면 오래도록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싶었다. 빌린 책이 아닌 나의 책에 마음대로 붉은 점으로 표시도 하고, 책 빈 곳에 생각나는 글귀를 마음껏 써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내게는 자주 허락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주 드물게, 어쩌다 여유가 생겨 책을 살 수 있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보았다. 두고두고 되풀이해 읽을 수 있는 책, 문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책이어야 했다. 그 무렵 내 방에 놓인 책들은, 모두 그렇게 고심한 끝에 고른 것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책 한 권, 한 권에 대한 애틋함은 각별했다. 절대로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 나는 감히 장담했다.
하지만 가난 앞에서는 그러한 확신도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나마 집안에서 돈과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맹자》 한 질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돈 이백 전(錢)에 그 책을 내주고, 양식을 얻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다시 핏기가 돌았으나, 나의 속은 더욱 쓰리고 아프기만 하였다. 책을 팔아서 먹을 것을 얻다니, 어느 하늘 아래 나 같은 선비가 또 있을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나에게는 책 한 질도 허락될 수 없는 사치였던가. 마음이 몹시 어지럽고 서글펐다.
그렇게 마음이 우울하고 심란할 때면 벗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발걸음이 어느새, 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득공(柳得恭)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는 벗을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자네, 오늘 내가 누구에게 밥을 얻어먹은 줄 아는가?”
“…….”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여느 때와 달리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데다가, 공연히 허둥대는 목소리가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긴 흉년에 얻어먹을 데가 어디 있으며, 준다고 해도 내가 얻어먹을 주변머리나 있는 사람이던가.
“글쎄, 맹자께서 양식을 잔뜩 갖다 주시더군. 그 동안 내가 당신의 글을 수도 없이 읽어 주어 고마웠던 모양일세.”
“아…….”
가느다란 한숨 소리와 함께 유득공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나의 방에 고이 모셔져 있던 《맹자》 한 질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얻고 나서 아이처럼 들뜬 나는 벗들 앞에서 한껏 자랑을 했었다.
유득공은 얼른 서글픈 표정을 감추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나도 좌씨에게 술이나 한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 그래도 허물없을 만큼 그의 글을 꽤 읽었지요.”
그러고는 책장에서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뽑아, 아이를 시켜 술을 사 오게 하였다.
오래도록 비어 있던 창자였는지라 술기운이 빨리 올랐다. 불콰해진 얼굴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술기운인지 울먹임인지 속은 자꾸만 메스껍고 헛헛한 마음에 객쩍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일 년 내내 맹씨와 좌씨의 책을 읽어 봐야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제 식솔의 굶주림 하나 구제할 수 없는 것을.”
“그렇지요. 당장에 팔아 한때의 굶주림을 면한 우리가 차라리 현명하지요. 맹자와 좌씨도 잘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기꺼이 맞장구쳐 주었다. 얼굴을 마주 보며 껄껄 웃기는 했지만, 웃음 뒤의 쓸쓸한 뒤끝을 우리는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과연 그랬을까, 자신들의 오랜 사색의 결과물을, 양식과 바꾸어 배를 채운 우리의 행동을 맹자나 좌씨는 잘했다고 할 것인가.
차마 놓아 보내지 못하고 몇 번이나 표지를 쓰다듬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책은, 분명 재촉하는 듯했다. 아이들의 얼굴을 제 몸 위에 겹쳐 떠오르게 하면서. 그렇다면 맹자나 좌씨는 몰라도, 책은 그날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살면서 나의 생활을 들여다보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비겁한 위안일까.
나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벗이 새삼 고마웠다. 흉년이라 어렵긴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나처럼 굳이 책을 팔아야 할 처지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맹자에게 밥을 얻어먹었노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떠벌리긴 했어도 내가 얼마나 서글프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찾아왔는지, 유득공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선뜻 자신의 책까지 내다 팔아 나와 아픔을 같이 하고, 또 나의 부끄러움을 덜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역시 무척이나 책을 아끼는 사람이었으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이러한 벗들과 책이 있었기에, 나의 가난한 젊은 날은 그리 서럽거나 외롭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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